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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5년 그리고,

단미채미 2020. 5. 3. 16:18

 

베리가 좋아하는 굴포천 길:)

 

써야지 기억해야지 했던 비행인데, 정신차리고 보니 며칠이 훌쩍 지나 이제는 가물가물한 비행이 되버렸다. 이 비행을 한단어로 표현한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식상하지만 '역대급' 뭐 이정도? 혹은 '종합선물세트' ... 친한 친구들에게 종종 말하는 얘기 중 하나는 손님이 나를 힘들게 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어차피 한번 보고 안보게 되는 사람들이라 나는 그들이 나에게 과한걸 요구하거나 무례하게 굴어도 그냥 넘겨버린다고. 차가운 얘기일 수 있지만 나와 인연을 맺는 사람이 아니니까. 한번 보고 말 사람이니까. 대신에 같이 일하는 동료 승무원들이 힘들게 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말했는데, 이번 비행은 그런 내 말이 무색하게도 승객 때문에(?) 덕분에(?) 힘듦을 느꼈던 비행이었다. 

 

 

추방당해 고국으로 돌아가는 승객이 전체 승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 중 한명이 난동을 부려서 경찰 인계까지 하고. 소견서를 들고 탄 한 승객은 원인불명의 병으로 고국에 돌아가 검사를 받으려는... 상태가 좋지 않은 승객까지. 각종 응급처치를 하고 의사선생님도 없는 비행기 안에서 여기저기 뛰어가며 상황을 수습했던 비행. 사실 이렇게 적다보니 내가 실제로 겪은 비행에 비해 너무 간단해서; 당황스럽기도 하다. 오늘에서야 돌이켜보니 내가 조금 더 시야가 넓었다면 이렇게 저렇게 잘 마무리 했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일인데, 막상 그 당시에는 정말 무기력함을 느낄 정도로 내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게 절망적이었다. 그 와중에 그런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나라는 존재라는 것도 더더욱. 

 

 

딱 그런 상황이 주어졌을 때 내가 지시를 받아서 보조해준다는 생각은 꽤 해봤지만, 내가 지시를 내리면서 보조를 맞춰준다는 상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니기도 하고 너무 내가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던 중 이 일을 겪으니까... 뭐랄까... 내가 두려움에 혹은 겸손함에 애써 내가 지금 해야할 일들을 미뤄놓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해 부터인가 올해의 목표는 '열심히 살지 않기' 로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했다. 그게 아마 2-3년 정도 전 부터? 였던 듯. 많은 선후배 동료들이 있는 이 회사에서 튀지 않으려 생각해 낸 나의 하나의 목표였달까. 사실 난 열심히 사는게 아닌데 다들 그렇게 봐 주어서 부담도 됐고 눈치도 봤고. 눈치 볼 일이 점점 생기다 보니까 애써 그렇게 나의 열정을 밀어냈던 듯 하다. 그게 오늘까지 이어져서, 내 기준에 나는 정말 '열심히 하지 않는 비행'을 해버렸고 그 후폭풍이 거세서... 기분이 뭐랄까 좀 답답하기도 하다. 여운이 불쾌하게 오래 남는 그런 일. 

 

 

** 며칠의 공백이 있었고 생각을 정리하고나니,

다시는 이런 일을 겪었을 때 가만히 있는 내가 되고싶지 않다. 앗바 듀티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상구 좌석에서 내내 머리가 깨질 정도로 고민하고 반성하고 속상해했지만 이미 지난 일을 내가 다시 바꿀 수는 없었다. 아직 얼마나 더 지나야 완성된 내가 될런지 지금은 모르지만 이런 고민을 하고 발전 할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해야지 싶다. 나는 복잡하지만 때로는 또 단순한 나라서 힘든 일을 겪고 그걸 위로해준 나날을 보내고나니 금새 또 이렇게 잊게 된다. 다만 하나, 순간을 잘 넘겼다고 고민을 미뤄두지 말고 그 언젠가 있을 날을 위해서 더 부지런히 발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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